4) 인적 연망을 보여주는 자료들 ?

그러던 중 1992년 극동문서보관소를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이 중 한국관련 문서들은 주로 RG 554(극동군 최고사령부, 연합국 최고사령부, 유엔군사령부-Records of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Supreme Commander Allied Powers, and United Nations Command)로 이관되었다. 향교유림에 의해 자치적으로 관리되던 문묘는 통감부가 1908년 9월 공포한 「享祀釐正에 관한 건」으로 인하여 1개 군에서는 하나의 문묘에서만 향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정부 소관으로 이관되었다. 최만식 소장본은 1960-70년대 충북도정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며 당시 지방행정의 면면을 살펴보는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러시아의 경우 문서를 국보로 여길 정도로 문서의 중요성이 일찍부터 인식되어 왔으므로 극동지역의 한인들에 대한 기록들이 생생히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동안 톰스크의 문서는 러시아의 일부학자들에게만 공개되어 왔다. 연구자가 입수한 이들 문서는 국립문서보관소 직원들이 검토한 후 복사하여 제공한 자료이다. 이들 문서들은 토지분배, 한인의 당가입, 당학교나 기술교육대학 입학, 당원청결문제. 블라디보스톡 동방대학 문서 폰드번호 226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극동문서보관소에는 현재 한인이주관계, 한인귀화관계, 1905-1917년까지 한인의 독립운동, 1923년 이후 사회주의 건설기의 한인 등에 대한 자료가 집중되어 있다. Ф.1의 Оп.2, Д.2020, Л.1/3/6(3건)과 Оп.11, Д.164,Л.3-4/4а-4аоб./5-6об./7/8-8об./9-9об./10-11/12-12об./13-13об./14-14об./15-15об./18/19/20-20об./21-21об./22/23-23об./28/29/32-32об./33-33об./35/36/37-37об./38-38об.(25건)은 블라디보스톡과 하바로프스크 등지에서 최관흘과 이후의 장로교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이에 대한 프리아무르 및 연해주 당국과 정교회 지도부의 반응 및 대응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극동국립역사문서보관소의 한인관련 문서군(Фонд)은 주로 Ф.1(연해주 주관리국/Приморское областное правление/1898-1917), Ф.2, Ф.28(블라디보스톡 시참사회/Владивостокская Городская Управа), Ф.143, Ф.244(블라디보스톡 주교구 관리국/Владивостокское Епархиальное управление), Ф.226(블라디보스톡 동방대학교/Восточный Институт во Владивостоке), Ф.702(프리아무르 군사령관지사 사령부실/Канцелярия приамурского генерал-губернатора), Ф.704(아무르주지사/Военный губернатор Амурской области) 등이 있다. 또한 Ф.244의 Оп.3, Д.353, Л.35쪽(22건)은 1911년 4월 14일-1918년 1월 24일 시기 한인 박페오도르 사제의 정교회 활동에 대해서, Ф.702의 Оп.1, Д.566, Л.293/294/294об./296/297(5건)은 블라고베쉔스크 본성당의 종교감독국과 프리아무르 군관구 사령부실, 하바로프스크 군경찰국 간의 한인 김탁세 신분조회 요청 및 확인문제에 대해서, Л.332-333/337/336-336об.(3건)은 1914년 12월과 1915년 1월에 자레체 선교지구(миссионерский стан/선교지부) 선교사 요안 톨마체프 사제와 프리아무르 군사령관지사 곤다티 간의 비국적자 한인의 거주지로부터의 이주문제에 대해서, Д.748, Л.14/16-16об.(2건)은, 1912년 4월, 5월 교회용도의 부지를 외국국적 한인들에게 임대해 주는 것과 관련, 프리아무르 군사령관지사와 블라디보스톡 및 캄차트카 대주교 예프세비(Евсевий)에게 요청하는 내용에 대해서, Оп.3, Д.443, Л.13-17/21-26(2건)은 블라디보스톡 3년제 선교대학 규정 내용과 1914년 1월 4일 종무성(Ведомство правослвного исповедания)과 신성종무원 산하 경제국이 국가두마에 제출한 ‘블라디보스톡 주교구의 한인개종을 위한 한인선교부의 조직에 국고지원하는 문제에 관한 사업설명’에 대해서, Оп.5, Д.143, Л.64-71об.(1건)은 포세트지구 한인선교활동 및 선교사, 교회건축, 선교지구 설립, 교육발전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또 Ф.28의 Оп.1, Д.377, Л.24-24об./25/29-29об./40-40об.(4건)은 최관흘의 예배소 건물부지 할당 청원문제와 장로교의 활동에 대응한 정교회 지도부의 성전 건축, 교리문답학습 강화 등의 실질적인 대응 조치들에 대해서, Ф.87의 Оп.1, Д.278, Л.19(1건)과 Д.1566, Л.3(1건)은 최초의 한인정착촌인 티진헤(지신허) 마을 촌장 최운국을 포함한 한인 3가구의 최초의 정교회 세례와 세례자들이 러시아 국적에 편입되며 행했던 선서문에 대해서, Ф.143의 Оп.5, Д.143, Л.72-72об.(1건)는 블라디보스톡 주교구 정교선교협회 위원회의 활동 이후 한인을 포함한 이민족 교화 및 교육문제에 대해서, Ф.226의 Оп.1, Д.375, Л.1-2об.(1건)은 블라디보스톡 및 캄차트카 대주교가 장로교의 침투에 대응해 한인들에 대한 호소문을 인쇄해 줄 것을 동방대학교(Восточный Институт)(현 극동국립대학교 전신) 학장에게 요청하는 내용과 부록으로 호소문 ‘한인들에게 고하는 말’의 내용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유니언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약칭 UTS)는 뉴욕에 소재한 신학교로, 진보적인 학풍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722년 문서에서부터 1953년 문서에 이르기까지 총 4129개의 문서군에 약 50만종에 달하는 문서들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선 이 문서군들 중에서 한인의 정교회 및 개신교 종교활동과 관련, 연구자에 의해 직접 입수가 되어 해제가 된 문서들을 다음과 같다. 하바로프스크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소장된 러시아극동지역의 한인관련자료 가운데서 수집 해제대상이 된 자료들은 14개 문서군에 속해있는 총55개로 분류된 문서들이다. 예를 들어 한인관련 문서들이 포함된 14개 문서군(Fond, 폰드)의 경우를 보자. ㅅ. 소련근로자대표위원회 폰드(1926-1928)(폰드번호:P-2413): 4개의 오피스 0. 극동혁명위원회 폰드(1922-1924)(폰드번호:P-2422): 1개의 오피스 ㅈ. ㄷ. 블라디보스톡 의회 폰드(1875-1922)(폰드번호: 159번): 1개의 오피스. ㅁ. 연해주 총독문서 폰드(1884-1917)(폰드번호: 702번): 7개의 오피스. 극동문서보관소는 1923년 러시아 연해주가 공산화되면서 극동혁명위원회가 연해주 문서국 설립을 결정함에 따라 설립되었다. 충북중부지역 엽연초생산조합 2곳에서 105건의 11,629장을 자료조사 수집했으며, 충북중부지역 엽연초생산조합은 1912년 5월 보은군, 청주군, 진천군의 업무를 관장하는 청주군연초경작조합 설립을 시작으로 해서 지역간 군간 업무관활지역이 잦은 변경과 통폐합, 최근에는 국민금연운동으로 생산농가도 연년히 줄어들고 있으며, 거대한 광역통합에 따라 자료관리가 소홀한 가운데 금번 엽연초생산조합의 근현대자료조사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보여진다. 이번 창녕군 근현대 자료조사 및 수집에서는 고암면의 제적부, 제호부 일부, 이방면의 호적사건지원부를 수집하였다.

그런 점에서 이번 사업을 통해 오성월, 김법린 유품 관련 자료들을 대거 수집한 것은 앞으로 이들 불교계 인물에 대한 연구의 촉매제가 될 것이다. 장로교가 블라디보스톡에 공식적으로 출현한 것은 1909년이다. 당시 최관흘을 중심으로 한 장로교의 선교활동으로 블라디보스톡, 달네레첸스크, 하바로프스크, 하얼빈 등지의 한인 정교도들이 대거 장로교로 개종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이는 정교회의 독점적인 상황을 깨뜨리는 위협적인 상황에 이르렀을 만큼 정교회 지도부를 크게 긴장시킨 큰 사건이 되기도 했었다. 언급된 관련문서들은 특히 문서군별로 입수가 되어 당시의 상황을 집중적으로 조명해 주고 있다. 1889) 변오석은 1884년 3월 5일 全在烈의 중개로 그 사위인 李榮善에게 전문 110냥을 주고 畓 3두락을 샀다. 1395, 초명 玉鸞)은 1346년(충목왕 2)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李成桂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후인 공양왕 2년(1390) 戶曹判書에 오르고 이어 兵曹判書ㆍ吏曹判書에 오르며 크게 현달하였다. 을축년 원생안은 新安院生案, 院生案, 講堂塗壁保人, 保人案, 齋直案, 戶房, 奴婢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부산오피 주도하에 주자의 영정을 봉안할 影堂을 건립한 뒤 영조 48년(1772)에 이르러 서당 옆으로 이를 옮겼는데 이것이 바로 新安影堂이다.